영화 ‘파반느’는 “서사가 아니라 문장을 남기는 작품”이다.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원작으로, 이종필 감독이 냉소의 칼날 대신 온기의 언어를 선택해 다시 빚어낸 이 영화는, 2026년 2월20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되었다.
‘파반느’(Pavane)는 원래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한 느린 궁정 무용곡의 이름이다. 빠르고 화려한 것이 쏟아지는 오늘날 미디어 환경에서, 이 영화가 스스로의 이름을 ‘느린 춤’으로 택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선언에 가깝다. 그리고 영화는 실제로도 그 이름처럼 움직인다. 사건은 크지 않고, 감정은 천천히 번지고, 음악은 느리게 흐른다. 이 작품은 관람하는 동안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숨결을 들여다보는 경험에 더 가깝다.



영화의 큰 축은 ‘한 건물 안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세 인물의 관계 변화다. 고아성, 변요한, 문상민이 같은 백화점 건물 안에서 서로 다른 층위의 삶을 살아가는 청춘들로 등장한다. 백화점 매장 직원 미정(고아성), 지하 주차장 요원 요한(변요한), 같은 건물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경록(문상민)이 한 건물 안에서 반복적으로 스쳐 지나가고, 이들의 동선과 감정이 서서히 교차되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 미정(고아성) : 성적 1위로 입사했지만 외모라는 기준때문에 밀려나 지하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인물, 고아성은 이 역할을 위해 10kg 증량과 푸석한 분장을 감수하며 캐릭터를 완벽히 체화했다.
* 경록(문상민) :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를 안고 무용수의 꿈을 접은 채 지하 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청년
* 요한(변요한) : 가벼운 농담 뒤에 진짜 자신을 숨긴 채 살아가는, 이 건물의 진짜 감시자 역할을 하는 인물
세 사람은 삼각관계를 이루지만, 흔히 보던 사랑을 쟁취하려는 경쟁 구도가 아니다. 이들은 사랑을 각기 다른 언어로 해석하는 인물들이다.
요한은 “모든 사랑은 오해다. 영원할 거라는 오해”라고 선언하는 인물이다. 그의 냉소는 체념이 아니라 방어에 가깝다. 사랑이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인정해 상처를 최소화하려는 태도다, 그러나 그 오해를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이 요한이라는 인물의 비극이자 아름다움이다. 요한은 넉살 좋은 농담을 던지다가도 아픔과 외로움이 얼굴에 드러나는 순간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며 극의 텐션을 담당한다.
경록은 “남들이 진짜고 내가 가짜가 아닐까?”라고 중얼거리는 청년이다. 미정을 만나면서 “우리는 진짜구나”라는 감각에 도달하는 그에게 사랑은 정체성 회복이다. 문상민은 ‘완성되지 않은 청춘’의 단면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미정은 세 인물 중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큰 변화를 겪는다. “당신은 캄캄한 어둠 속에 있던 나를 불러 세웠다”는 그녀의 고백은 이 영화가 사랑을 존재의 확인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압축한다. 누군가에게 불려 세워진다는 것은, 더 이상 ‘없는 사람’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고아성은 미정이 서서히 빛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섬세한 눈빛의 변주로 설득력 있게 표현해낸다.



박민규의 원작 소설은 외모지상주의나 자본의 논리를 냉소적으로 해부한 텍스트였다. 출간 이후 오랫동안 영상화 논의되었으나 쉽지 않은 작품으로 분류되어온 이유도 그 날카로움 때문이었다.
이종필 감독은 이 소설의 사회 비판적 결은 유지하되, 냉소의 칼날 대신 온도의 변화를 택했다. 원작이 1인칭 경록의 시점으로만 전개된다면, 영화는 세 인물의 시선을 골고루 담아 각자의 상처와 성장을 균형 있게 다룬다. 덕분에 원작의 날은 다소 둥글어졌지만, 대신 관객이 받아 안을 수 있는 위로의 밀도가 훨씬 높아졌다.
영화 ‘파반느’는 ‘빛’과 ‘층위’를 감정의 장치로 사용한다. 백화점의 지하 주차장과 엘리베이터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이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조물처럼 기능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반전이나 사건이 아니라 “장면이 감정을 어떻게 이동시키는가”이며, 그 이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가 반복되는 동선과 문장들이다.
원작이 사회적 잔혹함을 더 차갑게 포착했다면, 영화는 그 잔혹함을 정면 돌파하기보다 “그래도 사랑해도 된다”는 쪽으로 관객을 이끈다. 그 선택이 바로 이종필 감독의 ‘파반느’만의 개성이다.



영화 ‘파반느’는 ‘정통 멜로’의 형식을 오랜만에 정면으로 밀어붙이며, 자극적인 사건 없이도 인물의 심리만으로도 러닝타임을 견인한다. 특히 “서로에게 빛이 되어준다”는 소개처럼, 인물들이 타인을 통해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되는 과정이 과장되지 않아 오히려 더 아프게 다가온다.
속도보다는 여운을 원하는 관객, 문장이 남는 멜로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영화 ‘파반느’는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영화 ‘파반느’ 정보
-관람등급
15세 관람가
-영화개봉
2026년02월20일
-영화감독
이종필
-출연배우
고아성
변요한
문상민 외
-상영시간
113분
글 _ 엠큐데이
사진제공 _ 넷플릭스
mqda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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